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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진속 이야기

한 아버지와 두 어머니

꺽이지않는 꿈 2011. 9. 10. 19:42

 


 

제 5 호 / 한 아버지와 두 어머니


 

사진 : 박만호

글 : 오영인

 

- 내가 만난 하나님 (1) 한 아버지와 두 어머니 글 / 오영인 1972년 8월 새벽, 경기도 포천 시골 단칸방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자그마한 시골의 한 가정에, 3남 2녀의 막내로 또 한 명의 생명이 탄생하였습니다. 박만호... 이렇게 나는 부모님과 형제들의 사랑과 축복 속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조금씩 아프기 시작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셨던 아버지... 시골이라 병원 진료조차 받기 힘든 환경이어서 가까운 병원을 갔지만, 어머니의 병은 차도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점점 더 수척해져만 갔고, 용하다던 한의원도 샅샅이 찾아 다녔지만, 어머니의 병 앞에서는 모든 것이 허사였습니다. 음식을 입에 넣어 본지가 언제인지 모릅니다. 매일 매일 반복되는 구토 증세와 터질듯 한 무거운 두통이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을 일어 켜 주질 않습니다. 더 이상의 노력도 어머니의 병 앞에서는 물거품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초췌해진 아내를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멈출 수 없는 눈물. 태어난 지 얼마 되는 않은 막둥이를 안은 채 정신만 멍해졌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어머니를 위해 자식들을 위해 고통가운데 계신 어머니를 이끌고 서울 큰 병원으로 갔습니다. 포천 영중면 영평리에서 서울 영동세브란스병원으로 가는 길은 어떻게 갔는지 모릅니다. 다섯 명의 자식은 이집 저집 맡겨 놓고, 도착한 세브란스병원! 그때 처음 들은 낯선 병의 이름은 뇌종양이었습니다. 그 병이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지 몰랐습니다. 의사선생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얘들 엄마는 얼마 살 지 못하실 것입니다. 뇌에 암이 퍼져 이미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하든 어머니를 하나님께 보내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젖조차 제대로 빨리지 못한 막둥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 숨조차 막힙니다. “하나님~! 제 아내를 살려주세요!” 아버지의 절규어린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렇게, 그렇게 저의 어머니는 점점 더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해져 나에게 줄 젖은 다 말라버렸습니다. 나는 울었습니다. 나는 엄마가 얼마나 큰 고통을 가진 병과 싸우고 있는지, 왜 엄마의 젖이 나오지 않은지 모릅니다. 말라비틀어진 엄마의 젖을 만지며 입을 갖다 대며, 마지막 남은 엄마의 냄새를 맡으며 울었습니다. 그런 저의 모습을 보면서 저의 어머니는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젖조차 떼지 못한 아기를 두고 가는 것이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던지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막둥이와 자식들을 뒤로 한 채 그렇게 하나님께로 가셔야만 하셨습니다. 그렇게 젖도 떼지 못한 저와 나머지 네 아이를 돌보아야 했던 아버지는 큰 상실감에 빠지셨습니다. 괴로움으로 인해 연일 술과 좌절감으로 살아 가셨습니다. 배가 고팠던 저를 데리고 마을 이곳, 저곳에 젖동냥도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 석 달이 지났습니다. 아버지는 두 돌이 된 나에게 예쁜 옷을 입혀 손을 붙잡고 어디론가 향하셨습니다. 그곳은 테이블도 있었고, 푹신한 의자도 있었습니다. 나는 처음 앉아보는 그 폭신한 의자에 앉아 사방을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엄마 같으신 분이 오셨습니다. 아니, 엄마였습니다. 나는 그 어머니를 처음 보는 순간, 엄마의 내음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품에 안기었습니다. 그렇게 지금의 어머니는 나에게 오셨습니다. 두 돌도 채 되지 않은 나와 다섯 아이의 엄마가 되기 위해 오신 어머니는 아이를 갖지 못해 두 번이나 결혼생활에 실패한 아픔이 있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로 인해 어머니는 또 다른 가정을 일구어 결혼생활을 한다는 것에 큰 용기가 필요하셨습니다. 더구나 자식이 다섯 명이나 있는 남자와 산다는 것은 더욱 생각과 번뇌가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자신의 품에 안겼던 두 돌도 되지 않은 사내아이가 자꾸만 생각이 났습니다. “엄마!” 하고 안긴 그 아이의 까만 눈망울 때문에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섯 명의 엄마가 되어 눈물로서, 기도로서 자신의 삶의 아픈 무게만큼이나 사랑을 쏟고 자신의 헌신을 쏟아 다섯 남매를 키우셨습니다. 때로는 새엄마이기에 남편과 자식들에게 오해와 핍박도 가슴에 안고 그 세월을 보내셔야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아픈 오해의 무게만큼 어머니는 ‘오직 예수’만을 붙잡고 살아 오셨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많은 희생을 하셨습니다. 넓은 벌판에 흩어져 있는 돌들을 손으로 일일이 다 고르시고 그 고른 손으로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장사를 하셨습니다. 그 장사하신 돈으로 다섯 아이들 학교도 보내고, 살림도 꾸리시면서 몸이 쉴 틈도 없이 일을 하셨습니다. 넓은 벌판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옵니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의지해 당신의 가슴에 나를 안고 밤새 기도로 울부짖으며 무서움을 떨쳐 보내셨습니다. 그렇게 어머니에게서의 위로는 바로 나였고, 야곱이 요셉을 사랑하듯 그렇게 나를 사랑으로 길렀습니다. 어느 형제들보다 나에게는 아주 각별한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어머니의 억척같은 삶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그대로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손에는 지문도 없고 손가락에 온갖 상처와 손톱이 다 빠지시도록 노동과 싸우셨습니다. 두 무릎도 거친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고생의 흔적들로 남아 얼마 전에는 인공관절 수술까지 받으셨습니다. 원래 어머니는 너무나도 여자 같으신 분이셨습니다. 예쁜 것 좋아하시고 남편에게 부드러운 사랑받으며 애교도 부려보고 싶고 예쁜 원피스하나 사 입고 예쁜 구두 신고 멋도 부려보고 싶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억척같은 삶이 그녀를 남자보다 더 강한 어머니로 만드셨습니다. 늘 새벽마다 나의 머리 가에 어둠을 깨치며 눈물로 기도하시던 어머니, 밥장사하시다 받은 꾸깃, 꾸깃한 돈으로 헌금이라고 주시던 어머니, 나는 그런 헌금으로 동네 아이들과 몰래 아이스크림을 사먹은 철없는 아이인데... 그 철없는 아이를 요셉이라 불러 주셨던 어머니, 사춘기 시절을 겪으며, 수많은 감정의 반항과 나의 행동에도 모든 것을 다 품어 주시던 어머니, 그렇게 지금의 어머니는 나를 꿈꾸는 자로 키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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